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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보물 제 281호)
-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요천로 1447번지(천거동)
- 규모 : 241.81㎡
- 본루 : 정면5칸, 측면4칸 팔작지붕 루 마루집
- 익루 : 정면3칸, 측면3칸
- 월랑 : 정면1칸, 측면3칸
- 조성년대 : 1419년 황희 광통루 축조
- 1434년(세종 16년) 부사 민공 중수
- 1437년(세종 19년) 부사 유지례 단청
- 1444년(세종 26년) 정인지 광한루 개칭
- 1582년(선조 15년) 부사 장의국 대규모 개수
-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탐
- 1599년(선조 32년) 부사 원신 재건
- 1626년(인조 4년) 부사 신감 중수
- 1855년(철종 6년) 부사 이상억 중수
- 1879년(고종 16년) 부사 이용준 월랑 설
- 1931년 군수 백정기, 남원면장 양재영 및 진사 이수봉 등이 보수 완료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 그 후 1434년 세종 16년에 남원부사 민공이 중수하고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용성지(龍城誌)'고 했다. 또 일설에는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하여 그 후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1879년 광한루가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북쪽의 층층대는 1877년(고종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하여 본관 전체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무너질 우려가 있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 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누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되 본관과 같이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고정시켜 본관의 기울음을 바로 잡고 외관으로도 더 화려하게 하였다. 이는 우연하게도 누각 건축사상 큰 의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을 가설하게 된 시초이며 이전까지는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하였다.
월랑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하층은 5단, 상층 5단의 층층계단이 있고 양측 난간에는 칸살을 설치하였으며 현관 옥상의 자그마한 지붕은 본관의 높고 큰 지붕과 조화를 이루어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기단은 막돌바른층 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돌 기둥을 세우고 2층 나루부분에는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사방이 모두 개방되게 하여 북쪽으로 교룡산, 남쪽으로 금암봉이 멀리는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소 혓바닥 모양을 하나 내고 위에 행공첨차를 놓아 외출목을 구성하고 다시 위에 우설을 내어 이익공과 비슷한 주심포건물을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다.
가구는 칠량으로 대들보를 전면의 평주와 내진의 평주위에 걸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며 종량위에 조각된 일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연목 및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귀의 춘설에는 활주를 받쳤다.
누의 뒤쪽에는 익랑식(翼廊式)으로 월랑(月廊)이라는 누에 오르는 층계를 만들었고 그 구조의 익공식으로 창방위에 코끼리, 자라와 토끼 등 동물모양의 화반을 놓았다. 누의 뒤쪽으로 연달아 낸 익루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익루(翼樓)로 1795년(정조19, 부사 이만길 중수시)에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3면에는 퇴로를 둘러 개방하였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용 아궁이와 굴뚝이 사방을 쌓은 고막이 벽체에 나있다. 남원지(1960년) 및 증보 남원지(1972년, 조성교)등에는 1925년 보수공사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판단하기 어렵다.
광한루가 다른 누각과 비교할 수 없는 점은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리 우는 영정조시대에 창작활동이 활발하여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국악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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